지역활성화 사업 현장을 다니다 보면 처음 온 지역에서도 익숙한 풍경을 만난다. 오래된 건물은 붉은 벽돌과 노출 천장으로 단장돼 있다. 내부에는 원목 탁자와 식물이 놓이고, 한쪽은 카페, 다른 쪽은 공방과 전시공간으로 나뉜다. 이름에는 청년, 문화, 창작, 플랫폼이 붙는다.
간판을 가리면 어느 지역인지 알아보기 어렵다. 바닷가 마을과 산촌, 오래된 공업도시의 공간이 비슷한 얼굴로 방문객을 기다린다. 지역의 개성을 살리겠다며 투입한 예산이 지역의 차이를 지우는 데 쓰이고 있는 셈이다.
비슷한 공간은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는다
공간의 복제는 기획자의 아이디어 부족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실패 부담을 줄이려는 행정, 이미 검증된 사례를 선호하는 심사, 정해진 기간 안에 눈에 보이는 결과를 만들어야 하는 용역 구조가 함께 작동한다.
사업계획서에는 유명 지역의 성공 사례가 등장한다. 담당자는 “그곳처럼 만들어 달라”고 주문하고, 수행사는 카페·공방·전시·체험을 익숙한 조합으로 배치한다. 건물이 완성되면 준공 사진과 이용 면적, 좌석 수를 성과로 제출한다. 이 과정에서는 왜 이 공간이 필요한지, 누가 운영할지, 지원 종료 후 무엇으로 수입을 낼지가 뒤로 밀린다.
나는 이런 공간을 볼 때 “여기에서 카페를 빼면 무엇이 남습니까?”라고 묻는다. 지역의 산업과 사람, 생활방식에 관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 공간은 다른 지역으로 그대로 옮겨도 되는 시설이다. 다른 곳으로 복사할 수 있는 공간은 로컬공간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지역자원은 특산품 목록보다 깊은 곳에 있다
지역의 차이를 만들려면 관광지와 특산품을 정리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느 어촌에나 바다가 있고 어느 농촌에나 농산물이 있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와 농산물 체험만으로는 방문할 이유가 약하다.
그 마을의 어부가 물때를 읽는 방식, 주민들이 계절마다 함께 먹어온 음식, 오래된 공장에서 이어온 기술, 장날마다 반복되는 상인의 말과 행동까지 들어가야 한다. 관광자원으로 불리지 않았던 생활 속에 다른 지역이 흉내 내기 어려운 콘텐츠가 숨어 있다.
공방도 무엇을 만들 것인가보다 누구의 기술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장인의 작업을 30분짜리 체험으로 축소하면 방문객은 기념품 하나를 들고 떠난다. 기술을 배우는 과정, 지역 재료를 활용한 상품, 청년 창작자와의 협업, 판매와 교육이 연결돼야 지역에 일과 수입이 남는다.
복합문화공간이라는 이름도 편리하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 전시·공연·회의·교육을 모두 할 수 있다는 설명은 누구를 위한 공간인지 정하지 못했다는 고백이 되기도 한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공간은 책임지고 운영할 사람이 없을 때 아무 일도 지속되지 않는 공간으로 바뀐다.
건물을 짓기 전에 운영을 시험해야 한다
공간 조성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작은 운영 실험이다. 빈 점포나 마을회관을 활용해 주말 프로그램을 열고, 실제 방문객이 무엇에 반응하는지 살펴야 한다. 누가 몇 시간 머물렀는지, 어떤 상품을 구매했는지, 주민과 상인이 다시 참여하려 하는지 확인하면 필요한 공간의 크기와 기능이 보인다.
운영자도 준공 뒤 공모로 찾을 대상이 아니다. 기획 단계부터 참여해 고객, 프로그램, 가격, 수익구조, 지역 상인과의 협업 방식을 결정해야 한다. 운영할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인테리어부터 끝내면 사업자는 이미 만들어진 시설에 자신의 일을 억지로 끼워 넣게 된다.
성과평가도 준공률과 방문객 수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원이 끝난 뒤에도 문을 여는지, 운영자가 수입을 얻는지, 지역 사업자에게 소비가 퍼지는지, 방문객이 다시 찾는지를 살펴야 한다. 예쁜 공간을 만든 기관보다 오래 작동하는 지역사업을 만든 기관이 좋은 평가를 받아야 복제의 관행도 바뀐다.
로컬의 차이는 건축가가 선택한 벽돌 색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 지역에서 살아온 사람의 기술과 기억, 방문자가 참여할 수 있는 경험, 스스로 수입을 만들며 문을 열 수 있는 운영에서 드러난다.
이제 로컬활성화 사업은 “어떤 공간을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이 지역에서만 가능한 어떤 일을 오래 남길 것인가”부터 물어야 한다.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 채 만든 공간은 간판만 다른 카페와 공방으로 남는다.
칼럼니스트 소개
김용한 박사는 엠아이넥스트㈜ 대표이자 경영학박사·경영지도사로, 25년 이상 지역상권과 전통시장, 로컬관광, 소상공인·스타트업 현장에서 컨설팅과 강의를 수행해 왔다. 지역활성화 사업의 기획부터 운영, 성과관리까지 현장에서 축적한 경험을 바탕으로 시설 조성을 넘어 사람과 사업이 지속되는 로컬전략을 연구하고 제안하고 있다. 『지방소멸 시대, 지역은 어떻게 다시 작동해야 하는가』 등 다수의 실무서를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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