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지나다니는데 물건이 안 팔립니다.”
전국의 전통시장과 골목상권을 다니다 보면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시설을 정비하고 행사를 열고 마케팅을 지원해도 사업이 끝나면 다시 상권이 조용해지는 곳도 적지 않다.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김영기 기획경영본부장은 이 장면을 20년 넘게 지켜봤다. 일본 고베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고 항구도시연구센터에서 도시재생과 지역상권을 연구한 그는 귀국 후 시장경영진흥원과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에서 전통시장과 골목상권 정책을 담당해 왔다. 현재는 공단의 조직 운영과 정책기획, 대외협력 등을 총괄하고 있다.
최근 그가 펴낸 『상권은 설계다』는 그동안의 경험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 책이다.
“상권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설계되는 것이다.”
공실 하나가 상권 전체를 흔들었다
김 본부장이 상권을 ‘설계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된 데는 현장에서 경험한 한 장면이 크게 작용했다.
상권의 핵심 동선에 있던 점포 하나가 비었다. 처음에는 점포 한 곳의 문제처럼 보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보행 흐름이 끊겼고 주변 점포의 매출까지 떨어졌다. 공실 하나가 다시 다른 공실을 부르는 상황이 나타났다.
그는 이를 ‘공실의 연쇄 효과’로 바라봤다.
“개별 점포의 사유재산이라는 이유로 공실을 그대로 두면서 시설 정비와 마케팅만 반복해서는 상권을 살리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경험은 그가 상권을 바라보는 기준을 바꿨다. 장사가 안되는 원인을 상인의 노력 부족이나 개별 점포의 경쟁력만으로 설명하기보다 동선과 업종 구성, 공실, 임대료, 관리주체가 서로 연결된 하나의 구조로 봐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먼저 상권의 역할을 정하고 점포를 배치해야 한다”
김 본부장이 책에서 강조하는 개념 가운데 하나가 ‘선(先) 설계, 후(後) 배치’다.
어떤 가게가 들어오든 시장에 맡겨놓고 나중에 활성화 사업을 붙이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이다.
먼저 이 상권이 누구를 위한 곳인지 정해야 한다. 주민 생활형 상권인지, 관광객이 찾는 체류형 상권인지, 음식과 문화가 중심이 되는 상권인지에 따라 필요한 업종은 달라진다. 그다음 동선과 공간을 보고 필요한 점포를 배치해야 한다.
빈 점포를 바라보는 시선도 다르다.
공실을 상권 침체의 결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업종을 넣거나 동선을 다시 연결할 수 있는 상권 재편의 자산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책을 쓴 대상도 분명하다. 상권 활성화 정책을 담당하는 공공기관과 지방자치단체, 도시재생·지역경제 분야 관계자뿐 아니라 전통시장과 골목에서 매일 장사를 하는 상인들까지 염두에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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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보다 중요한 것은 ‘누가 계속 관리할 것인가’
필자가 여러 지역 상권을 컨설팅하면서도 자주 만나는 문제가 있다. 사업 기간에는 많은 사람이 움직이지만 사업이 끝나는 순간 관리할 사람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김 본부장의 문제의식도 이 지점과 맞닿아 있다.
“일회성 사업을 운영할 것인가, 지속 가능한 상권을 운영할 것인가를 계속 묻습니다.”
예산을 얼마나 확보했는지만으로 상권사업의 성과를 평가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지원이 종료된 이후에도 상인과 지역사회가 스스로 상권을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 남아 있는지를 봐야 한다.
그는 프랑스 파리 등의 사례를 참고한 공공의 상가 매입과 선매수권, 디지털 온누리상품권의 해외 관광객 이용 확대, 전통시장 활성화에 기업의 환경·사회·지배구조(ESG) 활동을 연결하는 방안 등도 향후 구체화하고 싶은 정책과제로 제시했다.
이제 질문부터 바꿔야 한다
김 본부장은 앞으로 자신이 어떤 전문가로 기억되고 싶은지 묻자 “대한민국 골목상권의 판을 바꾸고 지속 가능한 해법을 제시한 상권 설계 전문가”라고 답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강조한 대목은 지원 규모가 아니었다.
“얼마나 더 지원할 것인가가 아니라, 누가 이 상권을 어떤 구조로 설계하고 지속시킬 것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상권에 돈을 투입하는 일은 상대적으로 쉽다. 시설을 고치고 축제를 열고 홍보비를 지원하면 눈에 보이는 결과도 빠르게 나타난다.
어려운 일은 그다음이다.
사업이 끝난 뒤 누가 공실을 관리하고, 어떤 업종을 유치하고, 상인 간 갈등을 조정하며, 변화하는 고객에 맞춰 상권을 다시 움직이게 할 것인가.
『상권은 설계다』가 던지는 질문도 이곳에 닿아 있다.
뜨는 골목을 만드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그 골목이 쉽게 식지 않도록 운영하는 일이다. 이제 지역상권 정책도 ‘지원사업을 몇 개 했는가’에서 ‘지속 가능한 상권 운영체계를 남겼는가’로 성과의 기준을 바꿀 때다.
책 구입처 : 온라인 교보문고, http://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20871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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